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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센터 에디터스 레터]암호화폐 생태계의 역설

8월 5주차

  • 김흥록 기자
  • 2018-08-31 19:24:46
[디센터 에디터스 레터]암호화폐 생태계의 역설

블록체인을 취재하다보면 일종의 역설을 발견하는 경우가 종종 생깁니다. 주로 블록체인의 이상과 철학이 현실에서는 정반대의 모습으로 구현되는 형태입니다. 가장 흔하게 지적되는 부분이 바로 프라이버시입니다. 이더리움에 판문점 선언 등을 새기며 역사적 의미를 영원히 남기고 있지만 정작 블록체인에 리벤지 포르노 이미지 등이 올라간다면 알리고 싶지 않은 개인의 사생활이 영원히 남게 됩니다. 프라이버시를 중요시하는 사이퍼펑크 운동에서 비롯된 블록체인이 프라이버시 침해의 도구가 될 수 있다는 역설입니다.

암호화폐 거래소도 어찌보면 역설적 존재입니다. 암호화폐는 애초 거래의 익명성과 검열 저항성을 특징으로 하고 있습니다. 블록체인의 설계로는 암호화폐를 거래할 때 송신자와 수신자가 누구인지 알지 못합니다. 다만 현실에서는 중앙화한 거래소를 통해 거래하면서 그 내역을 모두 알 수 있게 됩니다. 익명성이 특징인 암호화폐 거래에서 시장 역할을 하는 거래소가 오히려 익명성을 걷어내는 통로가 되는 역설입니다.

사실 각국의 거래소들은 대부분 정부가 만든 질서 안으로 들어가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거래소 사업을 준비하는 한 업계 관계자에게 듣기로는 현재 일본에서는 정부가 내 준 암호화폐 거래소 라이센스가 최하 10억원에 거래된다고 합니다. 그게 몇개월 전 이야기니 지금은 가격이 더 올랐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국내도 마찬가지 입니다. 국내 대형거래소는 물론 해외 거래소의 한국법인까지 언젠가 등장할 정부 인가제의 문턱을 넘기 위해 벌써부터 촉각을 세우는 모습을 심심찮게 볼 수 있습니다.

거래소 뿐 아니라 암호화폐 생태계는 점차 초기의 혼란을 벗어나 제도권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2010년대 초반만하더라도 비트코인이 가장 활발히 이용되는 곳은 다크웹이었습니다. 비트코인은 당시 마약과 무기결제 등에 쓰이는 돈이었습니다. 검열저항성, 익명성이라는 비트코인의 특성이 그대로 현실 세계로 이어졌던 시기입니다. 그런데 2018년 현재 다크웹에서 쓰이는 비트코인은 전체 비트코인 이용 비중의 10% 언저리에 불과합니다. 대신 암호화폐 기업들은 점차 주류 산업계로 진입하고 있습니다. 채굴기 기업인 비트메인은 홍콩증시 상장을 진행합니다. 기업가치가 최대 34조원이라고 합니다. 국내에서는 카카오나 라인, 티몬 등 대기업들이 암호화폐를 사업 혁신의 도구로 활용합니다. 소규모 기업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현재 ICO를 진행하는 대다수 프로젝트들도 투자자 신원인증(KYC)를 거치는 등 기존 체제 안에서 성장하기 위해 힘쓰는 모습입니다.

그 결과 암호화폐 산업은 국가 경제에 보탬이 되는 단계에 이르렀습니다. 디센터는 이번주 시작한 [내일을 일한다]시리즈에서 암호화폐 연구원에 대해 소개해드리기도 했습니다. 금융업계를 해체하고 정부의 영향력을 줄일 수 있다는 기술의 특성에도 불구하고, 암호화폐는 차곡차곡 주류업계로 진입하고 양질의 일자리를 창출해내는 방향으로 가고 있습니다.

모두가 질서를 지향하고 있습니다. 제도권 내에서 성장하고자 합니다. 그런데 정작 정부만이 암호화폐 시장을 무규제, 무질서의 형태로 남겨두고 있습니다. 그 사이 일부 암호화폐 거래소에서 해킹 피해가 일어나고 있고, 신일골드코인 같은 암호화폐 이름을 빌린 사기가 일어나고 투자자 손실은 커지고 있습니다. 감시할 방법이 없으니 거래소 내부의 가격 조작 가능성도 꾸준히 제기됩니다. 무엇보다 블록체인 스타트업은 싱가포르로, 스위스로 날아가고 있습니다. 원희룡 제주지사는 지난 30일 한 행사에서 “정부의 가상계좌 발급 금지 등 여러 규제 때문에 한국의 많은 유망 스타트업들이 스위스 주크 같은 도시로 빠져나간다”며 “주크에 현재 11만 개의 새로운 일자리가 들어섰는데 상당수는 한국에서 만들어 준 것이나 다름 없다”며 제도화를 촉구했습니다.

산업계와 학계, 법조계는 제발 이런 현실을 직시하고 사업 기반을 만들어달라고 호소합니다. 정부는 꿈적도 하지않고 있습니다. 민간에서는 규칙을 달라 하고, 정부는 상황을 바라만 봅니다. 블록체인 생태계에서 보는 가장 큰 역설입니다.

/김흥록기자 rok@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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